제목 :말씀으로 하나 된 교회

본문 : 사도행전 11장 1절~18절

설교자 : 조 정 의

 

미국에 가기 전까지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영화, 게임 등을 불법으로 즐겼던 나는 미국에서 아주 어린 아이들도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수십만원짜리 성경 프로그램을 공짜로 사용하며 말씀을 연구하던 나에게 원어 성경 몇 줄만 출력해 줄 수 있냐고 묻는 친구의 말에 양심이 심히 찔렸다. 흥미로운 것은 불법 다운로드가 도둑질이라는 하나님의 진리가 명백했는데도 그걸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의 빛이 내 삶에 비쳤을 때 도저히 변명하거나 거부할 수 없었다.

문제는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여전히 불법 다운로드를 생활화하며 즐기는 이들에게 어떻게 진리를 말할 것 인지였다. 과거에 나도 무지했고 잘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교훈하신 것처럼 바른길을 신실하게 보여줄 책임이 있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첫 이방인 교회가 생기는 것을 목격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환상과 인도하심, 진리의 말씀과 역사로 베드로의 오랜 편견의 벽을 허물어 주셨다. 가이사랴 이방인 형제들의 청에 따라 며칠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베드로는 어쩌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말씀을 통해 베드로가 교회를 어떻게 진리로 설득했는지, 어떻게 교회가 하나 되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한다.

1.하나 되지 못한 교회(1-3)

오늘 사건에서 베드로여섯 형제(12절)를 비난한 성도들이 나 오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할례자 들이었다(2절). 할례자 들은 특별히 할례파라는 분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골 3:11; 딛 1:10) 유대인 출신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총칭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모세의 율법에 열심이 있었다(행 21:20).

왜 그들은 베드로를 비난했을까? 그들이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1절). 이것이 비난할 일인가? 아니다. 그 들이 비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3절).

오늘날 성도가 구도자의 집에 방문하여 함께 식사하며 복음을 전 했고 그들이 말씀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 하거나 판단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초대교회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이 유대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할례를 행하여 유대인으로 개종하면 구원의 기회가 있지만, 그렇게 하기도 전에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교제하며 복음을 전하는 건 문제가 있었다(18절). 오늘날로 치면 불신자가 교회 와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건 괜찮지만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어울리며 복음을 전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창세기의 해설서와 같은 희년서에는 “너 자신을 열방에서 떨어져 있게 하고, 이들과 함께 먹지 말라. 즉 이들의 일을 따라서 행 하지 말고, 이들의 동료가 되지 말라. 왜냐하면 이들의 일은 부정한 것이며, 이들의 모든 길은 타락이며 혐오스럽고 부정하기 때문이다”라는 명령이 나온다(22.16).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이런 가르침에 철저히 순종했기 때문에 더럽고 부정한 이방인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3절).

누가 옳은가? 베드로인가 아니면 유대인 성도들인가?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는가 아니면 먼저는 유대인으로 개종해야 하는가?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하고 교제하는 건 죄인가? 교회는 여전히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하는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참고. 행 15장)

베드로는 유대인 성도들과 같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과 역사로 그 편견의 벽이 허물어지고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과 같이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의 비난과 판단에 맞서고 있다. 어떻게 그 들을 진리로 이끌 수 있을까? 형제들이 오해를 불식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 수 있도록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2.하나 되게 하는 말씀(4-17)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베드로가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자매였다는 것이다. 때로 교회는 비방자와 원수의 거짓에 맞서 진리를 강하게 변호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말씀을 조롱하는 그들의 태도를 지적하고 담대하게 그들의 악과 무지함을 고발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성도가 성도와 진리로 하나 되기 위해 설득이 필요할 때, “모든 겸손과 온유”가 필요하다(엡 4:2).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해야 한다(엡 4:15, 우리말성경). 베드로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아직 모르고 있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에 어찌 차별을 두려워하느냐’ 고 호되게 책망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럴 수 있냐고 면박을 주지 않았고,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냐 고 조롱하지 않았다.

동시에 베드로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를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게요. 제가 이방인과 함께 먹은 일은 좀 문제가 되겠네요 ’라는 식으로 잘못된 비난을 하는 이들에게 맞춰주려고 억지로 수긍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와 일으키신 역사를 그들에게 차례로 설명했다(4절). 5절부터 17절까지 베드로가 설명한 내용은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을 베드로의 입장에서 일인칭 시점으로 재기술한 것인데, 여기서 부각되는 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5-10절에 베드로가 설명한 대로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 큰 보자기 같은 그릇 속에 각종 부정한 음식을 보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하셨고,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라고 완강히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세 번 반복하여 교훈 하셨다.

성령 하나님은 11-12절에 베드로가 설명한 대로 가이사랴에서 보낸 사람이 베드로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을 때, 베드로에게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고 명하셨다(‘아무 차별 말고’). 성령의 말씀에 따라서 욥바에 사는 여섯 유대인 형제도 베드로와 함께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 들어갔다. 이들은 지금 베드로가 성도를 설득하는데 함께 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의 증인이 되었다.

가이사랴로 여섯 형제와 함께 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13-14절을 보면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만한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절정은 성령의 역사이다. 15절에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성령은 그가 말을 시작할 때 이방인들에게 임하셨다. 오순절에 유대인 성도에게 임하셨던 것과 같이. 또 유대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을 주신 것 같이 이방인에게 같은 성령을 선물로(은혜로) 주셨다(17절).

베드로는 이것이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고(16절, 행 1:5),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 확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차례로 설명한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이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니, 절대로 반대할 수 없다고 유대인 형제들을 설득했다.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배워 나가고 있을 때, 연회에 강사로 초청된 제리 브릿지즈가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여러분, 진리를 열심히 연구하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교회로 돌아가 성도를 진리를 인도할 때, 성도들이 단지 몇몇 진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거나 잘 모른다고 해서 절대로 답답해 하거나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마십시오. 다만 신실하게 사랑으로 진리를 설명하십시오.”

참 진리이신 예수님은 무지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분은 진리만 충만한 분이 아니셨고 은혜도 충만하신 분이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진리로 하나 될 때 평안의 매는 줄로 진리의 영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 4:3).

자기 삶의 몇몇 영역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데 자주 실패하면서 ‘주재권 구원’을 이론적으로 잘 모르는 성도를 무시하며 책망하는 모습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자기 삶에 들보가 있으면서 상대방의 티를 제거하기 위해 교만과 무례함을 드러내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형제자매를 참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마음,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입고 진리를 설명해야 한다. 내가 아니라 말씀이 성도를 하나가 되게 한다. 내 말투와 어조와 잘못된 태도가 성도가 진리를 받는 데 방해물이 되지 않게 하라. 오직 말씀, 하나님의 진리만 사랑으로 가르치라.

3. 하나 된 교회(18)

유대에 있는 성도들은 베드로의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먼저, 그들은 잠잠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쏟아낸 여러 비난의 생각과 판단을 진리가 조용히 만든 것이다. 진리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을 때, 잘못된 판단과 편견을 허물었을 때, 그들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인정하고, 그 은혜를 약속의 백성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배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용하는 공동체이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게 알았다면, 교회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다. 아멘으로 수용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며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가르쳤다(딤전 3:15).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양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분명 한 것을 발견하면 교회는 그 진리를 굳게 받들고 서 있어야 한다. 그 진리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해야 한다(고후 10:5).

가령 교회는 동성애가 타고난 성향이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기 때문이다(고전 6:9). 교회는 낙태를 허용하자는 입장에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심히 기묘하게 지으셨고 그들의 날을 하 아님의 책에 기록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출 20:13; 시 139).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생명을 하나님의 교회가 그 어떤 이유로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자녀 양육에 대한 부모의 생각이 다양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체벌을(매를 사용하여) 하여 아이를 바른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는 말씀에 복종한다면, 교회는 부모의 체벌을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세상의 정책에 찬성할 수 없다(잠 13:24). 여성의 인권을 회복하려는 운동권에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발언을 할 때 교회는 세상의 목소리보다 성경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고전 14:34; 엡 5:23).

또한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성경 자체를 상고하라. 사람은 누구나 한계가 있다(팀 켈러-유신 진화론, 스프로울-유아세례, 존 파이퍼-은사주의).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베뢰아 사람처럼, 말씀에 최종 권위를 두고 말씀이 그렇다는 것에 확신이 생기면,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라.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말로만 주여 하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의 모임이다(마 7:21).

2013년 5월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교회는 수십 년간 해왔던 전통을 수정하는 엄청난 시도를 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제만큼이나 생각의 전환을 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너울. 우리는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에서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를 모든 여성에게 적용하기보다 기도나 예언을 하는 여성에게 적용하는 것이 실제 성경 이 말하는 진리에 가깝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예배 시간이 아니라 주일학교나 학생회 분반 등에서 자매가 실제로 기도하거나 가르칠 때 쓰는 것이 말씀의 바른 적용이라고 설명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교회가 말씀을 통해 무엇이 진리인지 설명했을 때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잘 이해하지 못해 따라오지 못한 몇몇 사람에게 성경을 펼쳐 보이며 차례로 설명했을 때 기쁨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참 교회의 성숙한 모습이다.

개인의 편견이나 공동체의 오랜 전통, 관습, 견해 등을 아무리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도 뛰어넘지 못하고 각각 자기 옳은 대로 행하면서 하나 되지 못하는 교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서로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신실하게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는 교회, 겸손과 온유로 옷 입고, 진리로 서로를 설득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으로 서로를 인도하는 교회,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교회는 참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드러내는 아름다운 몸 된 교회이다. 말씀으로 하나 된 교회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