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더 나은 본향
본문 : 히브리서 11:6, 13-16
설교자 :  조 성 훈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러분은 다 고향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더 나은 본향”이라고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절).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은 두 가지를 믿어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상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신뢰가 없이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고 그렇다면 신앙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13절). 이들은 앞에서 말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았던 사람들로서,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삶과 신앙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행함이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아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약속을 믿었으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놀랍게도 그와 같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에 안식하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믿음에는 삶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이러한 신뢰가 필요한데, 예를 들어 남편의 양복에 립스틱이 묻어있는 경우에 그동안 신뢰가 쌓인 부부라면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묻은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신뢰가 없는 부부라면 그날 밤 부부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신뢰라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실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삶을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그가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말은 약속의 삶을 바라보며 살다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그의 삶에서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다 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육체의 소욕과 사단의 방해로 순종치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그러한 삶에 마음 아파하지, 으레 그러려니 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행함이 없는 삶에 젖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13절). 많은 신앙인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약속을 바라보고 있고 성취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본향, 영원히 거할 안식을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이 땅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 하나님이 계신 하늘의 성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13절). 그들은 자신 앞에 일어날 일을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확신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믿음은 멀리 일어날 일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먼 미래에 있는 것이지만 현재 내가 그것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즐거움이 나의 삶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으며 오늘을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몇 달 뒤 새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라면 지금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재산을 곧 물려받을 예정이라면 미래에 일어날 그 일을 생각하며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삶이 변화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 부활의 즐거움, 하늘의 소망이 여러분의 삶에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3절). ‘나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라는 것이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에 평생을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15절). 그는 이 땅의 주인처럼 살 수도 있었지만 더 나은 본향을 생각했기에 돌아갈 수 있어도 돌아가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6절). 신앙인의 공통점은 그들의 마음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더 나은 본향으로 바라보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6절).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에 대해 기뻐하십니다. 욥이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그러하셨고, 하나님은 그 신뢰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마음 상하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중단하고 우상을 찾아가고 자신을 신뢰할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고향을 떠나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이 땅을 나그네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멀리서 믿음의 눈으로 보고 환영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모든 약속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현재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그러므로 여러분의 눈은 계속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그렇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정작 이 땅에서 누리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만난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곳을 사모하며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인데 지금 그곳,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도 그곳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현재의 삶으로 누리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이 땅을 향하는 동안에는 그러한 즐거움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큰 소망이고 즐거움입니다. 이 땅을 사시면서 여러분에게도 그것이 가장 큰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