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더디 믿는 마음을 뜨겁게한 말씀
본문: 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주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는 사라졌습니다. 무덤을 굳게 막고 있던 2톤에 가까운 돌문은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할 길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신 그대로 돌아가신 후 제 삼일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셨다고 확증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막 16; 요 20:14), 무덤에서 돌아오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마 28:8~9). 예수님은 또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내용에서 말하듯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눅 24:13), 시몬 베드로에게 따로 나타나셨습니다(눅 24:34).

그 후에도 예수님은 도마가 없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요 20:19), 도마가 있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26).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고(요 21:1),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으며(고전 15:6), 야고보에게만 나타나시기도 했습니다(고전 15:7). 마지막으로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 있던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눅 24:51),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전 15:8).

이 많은 장면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엠마오 길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신 장면입니다. 슬픈 빛을 띠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를 주님이 찾아오셨고, 부활을 더디 믿는 두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바꾸어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무지하고 믿음이 연약한 제자를 주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 자비롭고 인자한 성품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며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주님으로 인해 가슴이 불타오르기를 기도합니다(시 103:13~14).

그러기 위해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1. 더디 믿는 자들의 마음(13~24)

두 제자는 9절에 나오는 “사도와 다른 모든 이들”, 즉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은 “글로바”였고 다른 하나는 알 수 없습니다(18절). 그들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그 날” 즉 주일에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그 소식을 직접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놀랐지만, 도저히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획대로 고향(아마도)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주님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22~24절)

이들의 표현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많은 여인들이 이를 확실히 들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했다!” 이렇게 분명히 말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여자들이 시체는 못 봤는데…천사를 봤다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들과 함께 한 자 중 두어 사람 곧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에 가서 여인들의 말을 확인했는데 결론은 “예수는 보지 못했다”입니다. 결국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갈 때 예수님이 같은 길로 내려가는 순례자처럼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셨는데(15절),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 질문을 듣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섰는데, 17절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여인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기 힘들었던 이유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소망을 두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었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너무나 억울하게 그리고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믿었었던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이십 오리(11km) 되는 거리를 걸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지? 그때 그분이 하신 이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고 나사로도 살리지 않으셨는가? 그분 말고 정말 메시아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은 정말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면 참 메시아를 우리 지도자들이 죽인 것인가?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때론 논쟁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오는 내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기대는 온통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허탈함과 허망함, 슬픔을 가득 안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무슨 얘길 주고받았냐?”고 물으셨고(17절), 두 제자 중 하나인 글로바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8)

예수님의 죽으심이 당시 예루살렘 안에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만큼 떠들썩한 이야기였던 건 사실이지만, “너 혼자만 알지 못하냐?”고 묻는 걸 보면 정말 이 두 제자는 온통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이 일에 대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할 만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마음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다 알고 계셨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18~21절)

이 대답에서 우리는 두 제자의 슬픈 빛의 근원을 만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과 일에는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예수님을 사형 판결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 즉 구원할 자이신데, 자기 백성이 그분을 몰라보고 죽인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 벌써 사흘이 지났지만, 제자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면, 구원자라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야 하는데, 이렇게 자기 백성의 손에 죽어버리다니…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분의 말씀과 행하신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 일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혼란과 커다란 슬픔이 제자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그래서 그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걸까?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내가 처한 이 상황에서 고통받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계신 걸까? 주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왜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이기적인 이유로 구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주지 않으시는 걸까?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확실히 믿기가 힘듭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혼란과 슬픔은 너무나 크고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을 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더 어둬워지고 있는 두 제자를 주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탕자를 회복하기 위해 먼 거리에서 그를 향해 달려갔던 아버지처럼, 예수님은 믿음을 잃고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기 위해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오셨습니다.

2. 그 마음을 뜨겁게 한 말씀(25~32)

예수님은 홀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정신없을 때, 그들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15절)

여러분 어쩌면 궁금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옆에서 예수님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6절). 마가복음 16장 12절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가리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나중에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밝히셔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31절). 그 일은 엠마오에 가까이 왔을 때 일어났는데, 날이 저물고 어두워질 무렵 예수님과  두 제자는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을을 지나쳐 계속 가려고 했고, 제자들은 간절히 청하여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28~29절). 

예수님은 그들의 청에 따라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유하며 음식을 잡수셨고 떡을 가져다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30절).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고 사라졌습니다(31절).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떡을 가져다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는 장면에서 마지막 만찬 장면을 두 제자가 기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만찬은 열두 제자 즉 사도들과 나누셨고, 이 두 사람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33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갔을 때 열한 제자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누가는 두 제자가 후에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는지 분명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처음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16절) 나중에 그들이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봤다는 것입니다(31절).  둘 다 수동형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가리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아보게 했다면 그걸로 그들의 슬픔이 한 방에 걷히고 그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능력을 보여주시면,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것을 기적적으로 이루어주시면, 한 마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한 방에 보여주시면 혼란과 슬픔이 가득 찬 내 마음이 뜨거운 믿음으로 한 방에 불타오를 수 있을 텐데… 하나님은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그들의 시야에서 예수님은 사라졌고, 두 제자는 서로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봤어? 예수님 맞지? 정말 그분은 살아계시구나! 그분을 보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뜨거워진다! 이제야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말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흥분하며 서로에게 외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32절).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 있던 의심과 혼란과 슬픔을 모두 걷어내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든 건(불타게),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오해가 말씀으로 바로잡혔을 때, 그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그들이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믿음으로 불타오른 것입니다.

그들이 회상했던 길 위에서 있었던 장면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들이 큰 혼란과 슬픔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절)

‘미련하다’는 책망은 멍청하다는 경멸의 표현이 아니라, ‘생각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를 통해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강해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 모세는 모세 오경을(창세기~신명기),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의 모든 선지서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성경(구약)에 쓴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직접 전해주신 구약 성경 강해 설교가 얼마나 예리하게 그들의 무지를 제거했을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확실히 바로잡아 주었을까요? 정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셔야 했다는 것이 아마 더없이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혼란이 사라지고 슬픔이 완전히 걷히며 믿음이 굳건해지고 마음이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서 서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성경 말씀을 통해 확실히 알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는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그 후에야 눈을 밝히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고, 내가 처한 위기를 하나님이 뒤집으시고, 내 앞에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시면 한 방에 내 연약한 믿음이 불타오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런 식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말씀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롬 8:28).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 것 같은 환경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신 말씀이 필요합니다(마 6:32). 또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이 필요합니다(롬 8:32).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리고 이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롬 10:17).

저는 베드로후서 3장 18절 말씀을 사랑하여 책에 싸인을 할 때 꼭 그 구절을 적어주는데, 베드로는 이 글귀로 편지를 마쳤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제부터 영원히 살아계신 영광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내리시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것은 곧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며, 그 믿음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곧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이 사라지고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된 두 제자가 어떻게 했는지 마지막 장면을 살펴봅시다.

3. 믿음을 나눔(33~35)

그들은 “곧 그때로 일어”났습니다(33절). 즉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믿음을 거의 포기한 채로 고향으로 돌아와 자리 잡을 계획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을 뿐만 아니라 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엠마오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오는 길은 느리고 무거웠을 테지만 돌아가는 길은 빠르고 가벼웠을 것입니다.

가 보니 열한 제자(가룟 유다 제외)와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전에 먼저 그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고 말했습니다(34절). 정확히 베드로에게 어떻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하늘나라에 가면 아마 그 간증을 즐겁게 듣게 될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올라온 두 제자도 그 확실한 간증을 나머지 제자들과 나눴습니다. 길에서 있었던 일, 예수님이 떡을 떼며 자기들에게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일에 대해 나눴습니다. 제가 만일 엠마오에서 온 글로바나 다른 제자였다면 길에서 예수님이 설명하신 성경의 참 의미를 풀어 설명하기 위해 애썼을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39권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 그것을 다 풀어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에 혼란이 걷히고 슬픔이 사라지고 불타는 믿음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실 성도가 모여 하는 교제가 바로 이런 교제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며 서로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줍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경험하고 불타는 믿음으로 서로를 권하고 붙들어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비방이나 불평으로 끝나는 교제, 염려나 근심만 늘어놓는 교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대해서만 나누는 교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비방과 불평을 막아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모두 맡길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다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교제는 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혼란과 슬픔에 우리가 그대로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의 마음에 뜨거운 믿음을 타게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서로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전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녹음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의 강해 설교를 녹음해서 열한 사도와 나머지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풀어 설명하신 하나님 말씀 강해, 정말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할 때에.” 엠마오에서 온 두 제자가 한참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길에서 설명하신 것을 말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 인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44~45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직강이 시작된 것이죠. 이 이야기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설교란 단지 듣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좋은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풀어 설명하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긍정의 힘을 불어넣고, 칭찬과 격려를 하며, 삶의 소중함을 기억하게 하는 일은 꼭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뛰어난 강사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딤후 4:2). 또한 말세에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딤후 4:3~4).

여러분이 듣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설교라도 정말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그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려고 하는지, 그래서 그 말씀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성경을 이용해서 하고 있는지 잘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말씀을 아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여러분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연약해지고 큰 혼란과 슬픔이 마음을 채워나갈 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뜨겁게 불타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나의 믿음을 세우고, 성도의 믿음을 세워주는 우리가 되기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말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