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다르게 시작하기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절~5절

설교자: 이병권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교회들의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그 교회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그러합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바로잡고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계속 살펴보면서 조금씩 더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알아가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편지의 서론입니다. 바울은 당시 편지를 쓰는 형식에 따라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성경이니까 바울이 특별하게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고 편지 형식과 관련 없는 특별한 글을 쓰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읽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 형식에 맞게 그의 편지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직접 편지를 쓰는 일이 별로 없어서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도 편지를 쓸 때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형식이 있습니다. 받는 사람, 인사말, 편지의 내용, 마지막 인사, 쓴 날짜, 보내는 사람 등등, 편지를 쓸 때는 이러한 형식에 맞게 글을 씁니다. 그런 것처럼 바울도 그런 형식에 맞춰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편지 형식이 어떠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당시에 편지를 쓸 때는 서론에 다음 요소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간단한 인사말 등입니다.

그런데 서론의 각 요소들이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상황이나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에 따라 편지를 구성하는 요소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합니다. 교회에 따라서 편지의 형식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의 서론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점들은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의 서론을 보면 바울이 다르게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서론만 읽었을 때는 잘 구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그 서론을 비교하면서 읽거나 서론보다 좀 더 길게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좀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다른지 바울이 어떻게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지 편지의 서론을 구성하는 요소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세 가지 요소입니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인사말입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다르게 시작하는 요소는 보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

1절 마지막에 “바울은” 이라고 나오는데,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단순하게 바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길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의 긴 문장을 간단하게 말하면 바울 자신이 사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이중 부정과 이중 긍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두 번의 부정이 나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의 긍정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두 번의 부정과 두 번의 긍정을 구분하는 것이 가운데 있는 “오직”이라는 접속사입니다. 우리말로 ‘오직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니까 오해하기 쉬운데, 여기 ‘오직은 하나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 뜻은 ‘그러나’입니다. 그래서 1절의 표현은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택하셨고, 때가 되어 바울을 부르셔서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사도됨은 사도행전 9장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대적했던 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됨에 대해서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적극 변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바울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도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결국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 서론에서 보내는 사람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사도됨을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게 생긴 어려움이 이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보내는 사람을 길게 기록했는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2절에도 보내는 사람이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라고 기록합니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단순히 바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편지를 쓰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럼 이 부분은 바울이 어떤 면에서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 걸까요? 바울은 편지를 보내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자주 언급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를 보면 바울과 동역했던 사람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별로 다르게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수의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통,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경우에 그 이름을 명시하면서 몇몇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다수가 편지 보내는 사람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다른 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다르게 시작하면서 자신이 편지에서 전하는 말들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편지의 내용은 많은 형제들이 함께 하는 것으로 그들이 동의하고 공유하고 있는 내용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보내는 사람’을 통해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이 전하는 내용도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모든 형제들이 인정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편지의 권위와 그가 전하는 말의 무게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무겁고 진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요소인 보내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봤고, 이어서 두 번째로 살펴볼 다르게 시작하는 요소는 받는 사람입니다. 2절을 보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는 뭘 다르게 시작했는지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서신들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것은 받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성도’라는 표현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런 기본적인 표현조차도 없습니다. 만약 편지가 아니라 직접 바울이 말하는 것으로 상상해본다면 지금 바울의 이 표현은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감이 있고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불편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과 바울이 그 문제를 그만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불편한 마음은 인사말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세 번째로 살펴볼 다르게 시작하는 요소는 ‘인사말’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을 빌어줍니다. 바울의 이러한 인사말은 일반적입니다. 그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점은 인사말보다 이 인사말에 없는 것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의 인사말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심지어 문제 많은 교회,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그러한 감사의 인사가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불편하고 다급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는 바울의 생각과 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한 편지를 다르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그의 편지를 다르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럼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복음’의 문제입니다. 6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다른 복음을” 따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복음의 문제,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 바울의 편지를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르게 시작하는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나도 복음을 믿고 있는데 내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복음, 내가 따르는 복음에 대해서 난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제대로 믿고 있는지, 난 복음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시작을 가져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다르게 시작합니다. 복음이 그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나의 삶을 다르게 시작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복음의 능력을 생각하면서, 다시 복음을 마음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 놀라운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4)

이 복음이 우리에게 다른 시작을 주었습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4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신약에서 가장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조작전을 계획하셨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살리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둘째는 우리의 상태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 빠져있던 상태였습니다. 구조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스스로 나올 수 없었고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뜻을 따라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셋째는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생당하신 것은 뜻하지 않게 벌어진 사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안타까운 일들처럼, 원치 않았지만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그 일에 예수님이 희생양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단순히 실패에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다시 노력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 정도를 열어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하시고 위로하는 것,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시작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물에 빠진 자에게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수영을 하는지 직접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져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복음은 사람들이 만든 종교와 다릅니다. 뭔가를 배워서 뭔가를 보고 따라함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아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곳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같은 장소에 삽니다. 건짐 받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악한 세대와 구별된 삶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다른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건짐 받은 자로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악한 세대 가운데 살지만 이제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비록, 복음은 지금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같은 장소를 다르게 살도록 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른 마음으로, 다른 가치관으로, 다른 생각으로, 다른 꿈을 꾸며 삽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생명으로 우리가 다르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세상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치르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참된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르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기쁨의 소식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일을 계획하셨고,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주셨고,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일,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그런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생각할 때,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만이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바울이 다르게 시작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서론을 통해 복음에 대해서, 내가 믿고 있는 복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어진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하시고 그 가치를 되새기며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 뭐 다 아는 내용인데’, ‘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거지’ 혹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면 그 생각을 바꾸십시오.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다시 하나님 말씀 앞에 나아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복음으로 나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길 원합니다. 복음으로 그런 나를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우리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하며 놀라운 소망을 가진 자로서 오늘을 힘 있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복음의 역사가 계속해서 끊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의 삶이 복음으로 계속해서 변화되어 더 주님을 닮아가고 누군가가 복음을 깨달아 삶을 돌이키고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놀라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계속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금 복음을 되새며 복음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설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한 번의 새해를 맞으며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며 그동안 부족했던 것들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2019년 새해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까? 올 한해를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계획과 목표 가운데 복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복음을 내가 어떻게 살아낼까? 나에게 허락하신 복음의 은혜를 내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다시 복음에 집중하고 복음으로 힘을 얻어 복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