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구에게 좋게 하랴

본문: 갈라디아서 1장 10절

설교자: 이병권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종종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했던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들을 들으면서, 아이들이 바라는 것들, 갖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할 때 저는 아이들의 말을 다 들어줄 수 없고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마다 불만을 가지기도 하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공정하지 못함을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요구에 대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 들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도 아이들을 모두 똑같이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이 다른 아이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들어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은 아이들을 양육할 때에만 경험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우리가 살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하게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나의 자원에 한계가 있기에, 시간적인 한계가 있고 물질적인 한계가 있기에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며 모두에게 똑같이 잘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바라는 것과 기대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의 요구에 대해서 다 대응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내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움직인다면, 삶의 바람직한 목표와 방향과 관계없이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면 내 삶은 이리저리 휘둘리고 중심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 오늘의 제목입니다. “누구에게 좋게 하랴” 이 질문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이 사람에게 좋게 할까 아니면 저 사람에게 좋게 할까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힘 있는 사람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니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을 좋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에서 누구에게라는 것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사람이냐 하나님이냐이 둘 중에 내가 무엇을 더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사람이냐 하나님이냐이 둘 중에 내가 하려는 결정이 누구를 위함이고 누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하는 행동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누구에게 좋게 하랴”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목으로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였습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 하나인 햄릿의 유명한 대사를 따라한 것입니다. 원래 대사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를 두고 고민했던 햄릿처럼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살아가면서 계속 마주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냐 하나님이냐계속 고민하게 되는 문제이며, 계속 우리에게 유혹이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하나님을 뒤로하고 사람을 위해서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사람을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내가 이런 결정을 하려고 하는 것,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이 누구를 위함이며 누구를 생각함이며 누구를 두려워함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있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고민은 없어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전히 고민이 되고 때로는 더 고민하게 됩니다. 때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나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평안으로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어떨 때는 누군가의 작은 말 한마디에 크게 흔들리기도 합니다. 사람이냐 하나님이냐하는 질문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계속되는 갈등이며 끊이지 않는 고민이며 멈추지 않는 유혹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어떤 면에서 위로가 되는 사실은 이러한 고민이 지금 우리들만의 고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했고 어떤 사람들은 넘어지기도 했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누구에게 좋게 하랴” 라는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라고 답하고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 말씀을 버렸습니다.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고 진멸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했고 끝까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며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바리새인들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교회가 시작된 이후에는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가지게 되는 고민거리인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에 직접적으로 압박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했을 때 그 결과가 당장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택하면 내가 더 손해를 보거나 내가 더 수고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것은 그 반대입니다. 보다 실제적이고 당장 그 결과가 피부에 와 닿고 훨씬 더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좋게 하랴”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좋은 일을 할 때 누군가가 봤으면 좋겠고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고 작은 칭찬이라도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없으면 좀 서운하기도 하고 한 일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괜한 수고를 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우리가 신앙인으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때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우리 삶에 있어서 기준이 될 수 있는 행동 지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사람이냐 하나님이냐라는 선택에 대해서 “누구에게 좋게 하랴” 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마음에 새김으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고민할 때마다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본문을 잠깐 생각해보면 바울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합니다. 그리고 저주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거짓을 따르는 자에 대해서 엄하게 꾸짖은 것입니다. 책망에 이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오해하지 않도록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3절부터 바울이 자신의 간증을 시작하는데 오늘 본문은 바울의 책망과 바울의 간증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사람에게서 기쁨을 얻고 사람의 주목을 받으려고 했다면 갈라디아 교회에게 이런 책망의 편지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의 책망이 다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편지를 쓰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받을 때, 혹은 책망을 들을 때, 그것이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니까, 안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뢰하는 사이나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는 겁니다. ‘왜 나한데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책망한 것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런 의도가 없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고민이 되고 유혹이 되고 또 어려워하는 문제를 두고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알면, 우리도 그 원리를 따라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을 때 사람을 두려워함으로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일 때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서 그 동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이 편지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바울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편지를 쓰는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에 대한 동기와 하나님에 대한 동기를 대조하면서 자신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혹은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삶의 동기와 목적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바라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과 목적은 항상 하나님이 우선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사도 바울이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쉬웠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 역시도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고 싶은 유혹과 사람에게서 오는 압박이나 어려움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람을 위해 살지 않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 때 그에 따른 내 삶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학생이다’ 라고 했을 때 내가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학생으로서 합당한 일과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분명해집니다. 학생이기에 맞는 일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빠다 혹은 나는 엄마다’ 라고 했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안다면 아빠로서 혹은 엄마로서 해야 할 일과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히 부모로서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믿는 사람이다’ 라고 했을 때는 어떨까요? 이것은 우리가 가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늘 앞에 있어야 할 수식어입니다. 나는 믿는 아빠이고, 나는 믿는 학생이고, 나는 믿는 직장인이고, 나는 믿는 아내이고, 나는 믿는 할아버지, 믿는 할머니입니다.

이렇게 내가 누구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또 내가 누구인지 기억한다면 자연스럽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들 중에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바울은 사람이냐 하나님이냐갈림길에서 만약 자신이 사람을 선택했다면 사람을 위한 길을 갔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하나님을 택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사실이 아닌 것을 가정해서 분명한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A라면 당연한 결과로 B가 나온다. 그런데 결과가 B가 아니기에 당연히 A가 아니다’는 말입니다. 어떤 나무에서 감이 열렸으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가 아니다. 는 말입니다. 감이 열렸으니 당연히 감나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그 선택에 있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릅니다. 종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주인입니다. 주인의 인정이 우선이고 주인의 기쁨이 우선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옵션일 뿐입니다.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사람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은 무조건 책망 받을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혹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키거나 하나님을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거나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사람에게도 참된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합니다.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우리 삶에서 주님의 자리를 없애버리거나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삶에 최우선 순위에 제일 앞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좋게 하랴는 질문으로 자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나의 삶의 목표와 방향과 하는 일에 대해서 사람이냐, 하나님이냐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점검한 결과가 ‘하나님’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될 때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피고 다시 ‘하나님’이 되도록 돌이키기를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내가 누구를 바라봐야 하는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그 신분에 맞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절대로 바울의 목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이 기뻐하시는 일을 알고 그 일을 위해 수고합니다. 종은 주인이 명한 것을 주인의 뜻에 따라 행합니다. 그것이 종의 마땅한 본분이며 종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섬기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말입니다. 나는 정말 마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 나는 지금 누구의 종인지, 누구에게 관심을 두며,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누구의 칭찬을 바라고 있는지, 누구의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지, 정말 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것으로 나의 존재감을 높이려고 하고 사람들을 의식한 나머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람들을 배려하고 사람들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종은 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은혜를 나누십시오.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아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고 우리의 수고를 모두 아십니다. 아무도 모른다 할지라도 아무도 몰라준다 할지라도 주님이 모두 아십니다. 주님이 모두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계속해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고민될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 좋게 하랴여러분은 누구에게 좋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