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넘어가지 말라

본문: 갈라디아서 3장 1절-6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혹시 이단에 빠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길을 가다가 혹은 집에 찾아오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거짓에 빠져서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 수요일에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이란 다큐를 함께 본적이 있는데 거짓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런 거짓 가르침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걸 믿을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거짓에 속아 넘어갈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같아! 뭔가에 홀린 게 아니라면 저럴 수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책에서 작가가 유혹에 대해서 정리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유혹에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끌림의 단계입니다. 유혹을 받아 끌립니다. 저절로 눈이 가는 겁니다. 둘째는 쏠림의 단계입니다. 끌림의 단계가 발전되어 쏠립니다. 눈이 가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는 겁니다. 셋째는 꼴림의 단계입니다. 이제는 욕구가 생깁니다.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넷째는 홀림의 단계입니다. 정신이 나가서 그 유혹에 완전히 빠진 겁니다. 통찰력 있는 관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유혹에 빠져 홀리면 정상이 아닌 일들을 합니다. 도대체 왜 저런 일을 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런 일들이 수없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거짓을 따르기도 하고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가기도 하고 속임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홀려서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난 아니야, 넘어가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거야!’ 생각하지만, 또 넘어지기도 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책망이 그러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 바울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바울이 하고 있는 말은 경솔하고 무지한 행동을 하고 있는 갈라디아를 향한 직접적인 책망입니다. 1장에서도 책망이 있었는데(1:6) 지금의 책망은 훨씬 더 강한 책망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이 그러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책망을 들어 마땅한 일이고 정말 바보 같은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는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너희를 홀렸냐?‘ 이렇게 묻는 겁니다.

여기 “꾀더냐”로 번역된 단어는 강도 높은 속임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술과 같은 주술적인 느낌이 있는 단어입니다. 마술사가 현란한 손재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후에 속임수로 사람들을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을 참고하면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새번역 성경은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라고 되어 있고, 현대인의 성경은 누가 여러분을 유혹하였습니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성경은 누가 여러분을 미혹했습니까?”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좀 강하게 말하면 ‘너 제 정신이냐?’ ‘눈에 뭐가 씌었냐?’ 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형제들이 전한 다른 복음에 홀렸습니다. 다른 복음에 넘어간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 거짓으로 넘어갔습니다. 믿음이 아닌 율법의 행위라는 속임에 넘어갔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밝히 보았는데 이제는 유혹에 넘어가서 다른 복음에 홀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강력하게 그들을 도전합니다. 그들을 되돌리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2) 그러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점검할 수 있도록 연이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로 끝나는 문장이 계속 반복됩니다. 1절에 “꾀더냐”를 시작으로 해서 2절에 “믿음으로냐” 3절에 “어리석으냐”, “마치겠느냐” 4절에 “받았느냐”, “헛되냐” 5절에 “믿음에서냐”, 계속 질문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바울이 하는 질문의 의도를 살려서 표현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정신 차리고 똑바로 봐라‘

저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질문들을 세 가지로 살펴보면서 우리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경험적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 그들이 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 뭔가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을 지켰을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믿었을 때 성령이 그들 각자에서 임하셨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 다시 말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믿음이 아닌 율법의 행위를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시 질문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 갈라디아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이 이러합니다. 성령으로 잘 시작했는데 이제는 육체로 그 일을 마치려 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이제는 나의 수고로 마무리하겠다는 겁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는 것이고 말이 되지 않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시작과 완성을 의미하는 똑같은 두 단어를 빌립보서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시작이 있고 완성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시작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예수의 날까지 누가 이루십니까? 하나님입니다. 누가 그 일을 완성하십니까? 하나님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시고 완성하는 것도 하나님입니다.

비유하자면 비행기를 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해서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하늘을 날겠다고 비행기 안에서 손을 벌리고 날개 짓을 하면 어떨까요? 날 수 있을까요? 그게 나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하나님이 예수님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우리의 노력이나 율법의 순종이 추가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시작도 하나님이 하시고 그 과정도 하나님이 하시며 완성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바울의 첫 번째 질문에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나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씀합니다.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질문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좋은 일만 있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선동했고 바울을 핍박했습니다(행13:50)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믿은 제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바울이 한 일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복음을 믿는 자에게 따라오는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겪는 환난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예상했었고 각오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을 따르면 고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따르면서 유대인처럼 살면 그들의 핍박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복음을 버리고 진리를 떠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받은 고난을 모두 헛된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주님 안에서 받는 고난과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수고에 대해서 결코 헛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고전15:58).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진리를 버리고 다른 복음에 넘어가면 됩니다. 뭐에 홀린 것이 아니라면, 제정신이라면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하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고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이,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모두 날아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명절 때 외가 식구들과 함께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 어른들이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며 공원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진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시간이 되었을 때 저는 찍은 사진을 보려고 카메라를 확인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일입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필름 카메라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순간, 그동안 좋은 장소를 찾아 포즈를 취하며 찍었던 사진들, 가족들이 했던 모든 수고가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가 그날 날려버린 것은 가족이 담겨있는 사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고 넘어가서 단지 가족사진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날려버리기도 합니다. 지금 멋진 부모라 하더라도, 지금 괜찮은 남편과 아내라 하더라도, 지금 장래가 기대되는 청년이라 하더라도 죄가 들어오면 넘어가버리면 그 소중한 것들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에 넘어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을 때, 그 선을 넘어가 죄에 빠지게 될 때,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을 때, 거짓에 빠져 진리를 버릴 때,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처할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헛된 것으로 만드시겠습니까? 정말 그런 일을 하시겠습니까?

바울의 두 번째 질문에서의 결론입니다. 믿는 자로서 받는 고난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복음은 고난을 말씀합니다.복음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내 영혼은 안전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따라오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무엇보다 복음을 위한 모든 수고를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세 번째 질문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5) 바울은 2절에서 했던 질문을 관점을 바꾸어서 하나님 관점으로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성령을 주셨을 때 무엇을 근거로 주셨는지 묻는 것입니다. 질문은 다르지만 답은 모두 같습니다. 율법의 행위에서냐? 아니면 듣고 믿음에서냐? 믿음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고 그 가운데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근거해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놀라운 기적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

물론 지금은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이 있기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든지 눈에 보이지 않든지 간에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죄인이 구원받아 변화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복음, 하나님의 능력으로 확증된 복음,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일입니다. 곧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무서운 일입니다.

바울의 세 번째 질문에 대한 결론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확증된 것이고 갈라디아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경험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세 질문을 정리하면 복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고난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질문들을 마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논증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미 구약에서 말씀된 것입니다. 원래 율법의 행위였는데 바울이 자기 뜻대로 바꾼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때는 할례는 물론이고 율법도 없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로부터 10년 후에 할례를 명하셨고 400년도 더 지난 후에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증거가 분명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경험한 구원의 증거가 분명하게 믿음을 말씀하고 있고, 구약 성경이 분명하게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넘어간 다른 복음이 거짓임이 분명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리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복음입니다. 바울의 경고를 들은 갈라디아 교회는 자신이 다른 복음에 속아 넘어갔음을 깨닫고 다시 진리로 넘어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책망을 통해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수많은 유혹들과 진리를 떠난 거짓된 가르침들을 가지고 우리를 홀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헛된 것에 시선을 빼앗기게 만들고 헛된 것에 마음을 두게 합니다. 우리를 죄에 넘어지도록 거짓에 빠져 속아 넘어가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니 여러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1절의 말씀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 앞에 밝히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십니까? 뚜렷하게 보이십니까? 혹시 잘 보이지 않는다면, 믿음으로 마음눈을 열어서 나를 위해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매주일 마다 떡과 잔을 앞에 두고 주님의 희생을 기억합니다. 적어도 그 시간만이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내 마음을 채우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로 내 생각을 채우고 십자가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유혹과 거짓 가르침과 다양한 공격을 십자가로 맞서기 바랍니다.

나를 넘어뜨리려는 세상의 공격들과 유혹이 있을 때, 진리를 떠나 거짓을 따를 때 오는 편안함으로 넘어오라는 유혹이 있을 때, 죄에 빠지게 하려는 수많은 속삭임과 속임수에 대해서 여러분은 팔을 높이 들어서 단호하게 그 앞에 십자가를 꽂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뒤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넘어가서는 안 되는 그 경계선 앞에 십자가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넘어가고 싶은 유혹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나를 대신해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앞에서 멈추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가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가 가야할 길이 예수님이 먼저 가신 고난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이 없을 수 없지만, 고난조차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바라보고 넘어가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