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본문: 누가복음 22장 54절~62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주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 다락방에서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신 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 제자들과 자주 머무셨던 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눅 22:14-38).

예수님은 눈앞에 닥칠 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게 해달라고 온몸으로 기도하셨습니다(눅 22:39-46). 기도를 다 마친 후에 육신이 연약하여, 한 시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든 제자들을 깨우셨고, 그들은 곧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러 온 가룟 유다와 그가 끌고 온 큰 무리를 만납니다. 

잡혀서 끌려가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담대하게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검과 몽치를 들고 온 무리가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지만, “이제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붙잡았고, 제자들은 칼을 휘두르며 반항했지만, 오히려 그 휘두른 칼에 상처 입은 자를 치료하시고, 아무런 반항 없이 순순히 끌려가는 예수님의 확고한 의지를 보고 나서,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마 26:56; 막 14:50).

하지만, 모두 완전히 도망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열둘 중의 리더 격이었던 베드로, 그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무리가 예수님을 잡아끌고 들어간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붙었습니다.

54절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집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거리, 다른 제자는 모두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어두 컴컴한 밤길, 들키지 않기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혹시나 발각될까 걱정하는 마음과 앞으로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따라갔을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베드로와 함께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 집까지 따라왔는데, 그는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잡혀 들어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었는데, 요한이 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말해서, 안뜰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요 18:15-16).

예수님은 다음날 오전 십자가에 달리기 전까지 총 여섯 번의 불법적인 재판을 연달아 쉼 없이 받으셨습니다. 지금 끌려 들어간 대제사장의 집에서 한 번, 다음날 빌라도 법정에서 한 번(눅 23:1-7), 헤롯 안디바 앞에서 한 번(눅 23:8-12), 다시 빌라도에게 한 번(눅 23:13-25). 이렇게 총 네 번의 재판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번은 어디에서 일어났을까요?

바로 지금 예수님이 붙잡혀 가신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다음 날 아침 빌라도에게 넘겨지기 전까지 대제사장의 집에서 한 번이 아니라 총 세 번의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한 번은 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요 18:12-23), 또 한 번은 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마 26:57-68),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총 칠십일 명의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로 구성된 유대 종교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입니다(눅 22:66-71).

특별히 산헤드린 공회는 예루살렘 성전 대형 홀에서 개최하는 것이 일반이고, 죄인에 대한 심리는 사적인 장소에서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벽으로 둘러싸인, 그래서 아무도 알 수 없는, 대제사장 저택에서 신속하게 날치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산헤드린 구성원이 이 장소에 다 모이는 동안, 실세인 안나스에게 먼저, 그다음 가야바에게 심문을 당하셨고, 잠시 대제사장 집 지하에 딸린 감옥에 갇혔다가(눅 22:63-65), 날이 새고 다 모인 산헤드린 앞에서 마지막 심문을 받으셨을 것입니다(눅 22:66-71).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은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받는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베드로의 부인 장면 이후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66절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심문한 전 대제사장 안나스는 AD 6~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일하다가, 로마 통치자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자녀, 친척들이 유대 주요 관직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심문한 현 대제사장 가야바는 AD 18~37년까지 오랜 기간 봉직했는데, 그만큼 로마 정치권과 강력히 결탁한 사람으로, 안나스의 사위이기도 했습니다(요 18:13).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은 안나스의 집과 붙어있거나 적어도 안뜰을 공유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하나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고(요 18:12-13), 베드로는 그 심문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물의 안뜰에 있었습니다. 유월절 기간인 봄의 밤공기는 차가웠기 때문에(요 18:18), 사람들은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습니다.

55절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그 자리엔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들, 아랫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요 18:18). 베드로는 마치 그들 중 한 사람인 것처럼 무리 가운데 섞여 예수님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갑작스러운 시험이 닥쳤습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본 것입니다.

56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하니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여종은 “문을 지키는 여종”으로 요한의 부탁으로 베드로를 집 뜰에 들어가게 한 사람입니다(요 18:17). 베드로를 들여보내면서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여종이 베드로 가까이 왔다가, 불빛에 베드로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나자 그것을 잠시 주목하여 보다가, 순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권력 있는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 와서 그를 몰아세운 것도 아니고, 무장한 성전 경비대장이 무섭게 그를 추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문을 지키는 여종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여종의 말에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 위층에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고 있는 예수, 죽어 마땅한 그 사람과 너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니냐?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잡아온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포박하여 예수님이 심문당하는 그 자리로 나를 끌고 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함을 가진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57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저 사람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이 “부인”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막 14:68).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그리고 도대체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베드로는 아주 강력하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성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이 대답을 하고 “앞뜰로 나가 앞문까지 나아갑니다”(마 26:71; 막 14:68). 문을 빠져나가 도망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시험이 베드로를 막아섰습니다.

58절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고양이가 쥐를 몰듯 입구를 빠져나가려는 베드로를 막아선 한 남자가 베드로에게 “너도 그 도당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도 그들 중 하나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중 한 사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한 남자가 아니라 베드로를 처음 추궁한 “여종”이 다시 한번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라고 말합니다(막 14:69). 

또,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문 지키는 여종이 아닌 “다른 여종”이 베드로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추궁합니다. 그럼 누가 진짜 베드로를 두 번째로 추궁했을까요?

아마도 문 앞에서 한 남자, 불 피운 자리에 있던 문 지키는 여종, 그 옆의 다른 여종 등 여러 사람이 베드로를 계속해서 추궁하면서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부인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과 관계를 전면 부인했던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 나는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를 전면 부인한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합니다(마 26:72). 내가 맹세하는데, 나는 예수도 모르고, 예수의 제자도 모른다!

베드로가 왜 두 번째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주 강력하게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의심을 잠재웠을 것입니다. 아니면 빠져나가는 것이 더 의심을 사는 행동이어서 기회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심문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안나스의 방에서 이런 심리가 오갔습니다(요 18:19-24).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물었고, 예수님은 ‘내가 드러내 놓고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으니 나에게 묻지 말고 들은 자에게 물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치고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라고 꾸짖었습니다. 네가 친 사람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하나님이란 걸 아느냐?고 꾸짖고 싶은데, 예수님은 ‘내가 바른말을 했는데 왜 나를 치냐’고 물으실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안나스는 예수님의 교훈을 어떻게든 트집 잡아 예수를 죽이려 했고, 그의 제자들이 누군지 파악하여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모두 제거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수치와 조롱을 받고 두들겨 맞으면서도 아무런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에 넘겨지면서까지 베드로를 살리기 위해 베드로와 자기의 관계를 부인하셨고, 베드로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지고 있는 그 순간에,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 자기 사위에게 보냈는데, 그 직전에 베드로에게 세 번째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59절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이 남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말투를 들어보니 갈릴리 말투가 분명했고(마 26:73), 그러니 예수님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난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보면 이 남자뿐만 아니라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함께 추궁합니다(마 26:73; 막 14:70).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중 한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이었는데,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완전 궁지에 몰렸습니다.

베드로는 더 크게 더 강력하게 더 확실하게 부인해야만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60절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 14:71). 예수와 관계를 최대한 멀리 하려고,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지칭하면서,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부정했습니다. 저주하면서, 맹세하면서, 예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몸부림치듯 부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 말을 하고 있을 그때에 두 가지 일로 인해 베드로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첫 번째로 일어난 일은, 60절에 나옵니다.

60절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마치 새벽에 곤히 든 잠을 단번에 달아나게 만드는 알람 소리처럼, 도망치듯 예수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알람이 울렸습니다. 닭이 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두 번째로 일어난 일은 61절에 따라옵니다.

61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아마도 안나스가 가야바에게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보냈을 때, 예수님이 밖으로 나와 베드로를 지나치면서 베드로가 부인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맹세하는데 나는 저 사람과 아무 상관없다”라고 저주하며 외치던 베드로가 그 주님이 돌이켜 자기를 보신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하지만 주의 깊게 찬찬히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곧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가야바에게 끌려가셨지만,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와 주님의 눈빛을 통해 주님이 하신 말씀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61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죄 많은 어부였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그의 고깃배에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고기를 가득 채워주셨을 때,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5:8). 예수님은 베드로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너를 “게바”, 반석이라고 부를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눅 5:10). 그때부터 삼 년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영생의 말씀을 날마다 전해주셨습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로 그를 먹이셨습니다. 장모님의 병을 고쳐주셨고(눅 4:38), 그의 손을 잡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마 14:32).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마 16:16).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라고 고백했습니다(요 6:68).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인간의 육체로 가려진 영광, 태양처럼 빛나는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너무나 좋아서 초막을 짓고 산 위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 했습니다(마 17:4).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셨을 때, “아니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맹세했습니다(마 26:35). 베드로는 진심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자기 목숨이 두려워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 초라하고 연약한 자기 자신을 보고 낙심했습니다. 가야바로 끌려가시는 주님께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베드로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베드로처럼 자주 예수님을 부인하며 삽니다. 죄의 유혹,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 여러 세상의 염려가 나를 압도하여, 순간 예수님과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반응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교만해서 넘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절대 자기는 부인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교만했던 것입니다. 선 줄로 알고 넘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한 것입니다.

또 어쩌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 넘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한 시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육신이 약하여 잠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시험을 맞닥뜨리면, 넘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험에 넘어지는 삶이 반복되면, 그때마다 예수님을 부인한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자포자기한 삶을 살게 됩니다. 더 이상 어떻게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분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이런 사람이고, 또 넘어질게 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나는 나에게도 예수님께도 실망스러운 존재입니다. 

모든 매너리즘에 빠진 성도의 마음이 기본적으로 이와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주님도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그렇게까지 기뻐하지 않으실 것만 같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도, 그는 다시 어부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은 자격미달이라는 거죠. 예수님은 사랑하지만, 그분의 제자로 살기에 자신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삼 년 간 그물을 놓고 살아서였을까요,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 바닷가에 한 사람이 서서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밤새 한 마디로 잡히지 않았던 그물에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요한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주님이시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베드로는 바다로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자기를 처음 불러내신 주님이 그때와 똑같은 프러포즈를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처음엔 “주님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했던 베드로는 담대히 그분께 뛰어듭니다. 연약하지만 주님과 함께 하기 원합니다. 온전하지 않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은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아침 식사를 먹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말문이 막힙니다.“주님, 이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저는 주님을 위해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 마음속에 가시처럼 걸려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담대하게 진심을 고백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다시 한번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에 빠졌습니다. 세 번. 정확하게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횟수 아닙니까? 아마도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눈빛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져 심히 통곡했던 기억이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베드로는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진심을 아십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걸 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다시 소명을 일러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이 베드로를 다시 한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옥에 갇히고 목숨의 위협을 받아도 성령의 능력으로 어디서든 담대히 예수를 그리스도라 선포하고, 형제를 굳게 세우며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먹입니다. 

또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그가 부인했던 십자가의 길을 결국 따르게 되는데, 자기의 삶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처럼 마칩니다. 예수님처럼 심한 매질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달리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거꾸로 자기를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구주와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베드로를 마지막에 십자가까지 오르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합니다. 주님도 우리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연약함 때문에 주님은 대신 온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주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사랑과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를 향한 완벽한 사랑과 행위를 부어주시면서,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교만하게 자신만만하여 넘어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철저히 기도하며 의지하지 않고 잠자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다만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사 능력과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한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헤아려보십시오. 온 땅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세어 보십시오! 

주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그러니 주님을 향한 우리 연약한 사랑에 실망하여 주님의 사랑에서 스스로 밀어내지 말고, 주님의 완벽한 사랑에 힘 입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연약한 사랑을 키워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