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만일 죽음이 여러분을 찾아온다면 여러분은 그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자동차는 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장거리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다며 한참 불평을 할 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많은 노인들을 만나는데 그 분들은 저마다 여기저기 아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다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확률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보다 한참 전부터 몸에 이상이 와서 오랜 시간을 고통 받다가 죽게 되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그러니 고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육체를 많이 사용한 사람일수록 그 육체가 낡아진 것이니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짐진 것처럼 탄식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탄식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적인 탄식으로,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 원하는 만큼 주님을 섬기며 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탄식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육체가 낡아지니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고 고통없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목이 잘려서 죽었고 많은 사도들이 처참히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고통 받는 사람은 어서 주님께로 가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아 너무 괴롭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탄식 가운데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영원하고 완전한 몸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재미있게도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텐트’로 표현하고 있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곳을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분양받은 아파트가 다 지어져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이 집을 비우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마침 잘되었다’고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도 역시 하늘의 집이 준비되어 있는데 어느날 죽음이 찾아온다면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런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웃음으로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완전한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눈물도 없고 슬픔도 근심도 질병도 없는 완벽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다보면 신앙의 가장 큰 방해꾼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몸과 완전한 삶이라는 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홀로 수술실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죽음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따라올 수 없고 대신해 줄 수 없는 순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불안해하는 것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이 인공위성 발사를 앞두고 돼지머리를 가져다 놓고 절을 할 때 그들은 누구에게 절을 하는 것일까요?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누구라도 좋으니까 이 일을 성공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 봐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막연한 생각일 뿐,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놀라운 몸입니다. 완전한 몸과 완벽한 삶,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 땅에서 참 만족이 있을까요? 오늘 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먹고 살기에 가장 바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이 자신은 외롭다고 생각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할수록 그 영혼은 메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완전하고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참 만족과 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늘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그날엔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고 어쩌면 주님께 가졌던 많은 오해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새로운 집의 실내 장식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유업을 주실까요?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나라를 기대하게 됩니다.
결론
우리는 노년을 어떻게 즐거움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요? 손자 손녀를 보는 것으로 즐거울까요? 그리스도인이 노년을 즐겁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몸과 새로운 삶, 하나님의 유업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밝으면 주님과 하늘나라, 주님이 준비하신 처소와 삶, 유업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 노년의 고통을 즐거움으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 ‘마침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영광스러운 세계로 가게 될 것입니다. 안 가려고 발버둥 치지 말고 감사하면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세계와 주님과의 만남을 생각한다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