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탈권위와 소통의 시대입니다.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회에서는 정치지도자, 학교에서는 선생님, 가정에서는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권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직분이 주는 권위를 사용해야 할 때도 “권위주의”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 움츠러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태를 부추긴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권위가 남용된 역사적 사실과 그 폐해에 있을 것입니다. 주어진 권위를 이기적으로 마땅한 권리처럼 무절제하게 휘둘러 생긴 상처를 심리학이 싸매주고 있는 형세입니다. 심리학은 상처받은 이들을 피해자로 여기고 소통의 기술로 환자의 성질과 품성,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배려와 이해를 확장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사실 이러한 세태는 누군가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그에 합당한 반응을 기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거나 무례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치지도자가 국민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나 학교 선생님이 학생에게 엎드려 있지 말고 조용히 앉아서 수업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는 것, 부모가 자녀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권위를 사용하여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들리게 합니다. 내 상황도 모르고, 내 배경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냐고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권위를 가진 자리에 있더라도 나에게 요구할 권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영혼이 와서 쉬어야 할 곳입니다.

일주일 내내 힘겹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교회에서까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나와 그 품에서 푹 쉬고 위로받고 가고 싶습니다.

내 상황도 모르면서, 내 마음도 모르면서 무엇이 옳은지 나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나에게 어떤 제안이나 조언을 해줄 수 있지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권리가 나에게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믿음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탈권위와 소통의 시대의 장단점을 모두 들이마시며 사는 우리에게 바울은 충격적인 요구를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바울은 디모데(“너”)를 “병사”(soldier)라고 부릅니다. 군대는 가장 권위 있는 구조를 가진 조직입니다. 심지어 탈권위 사회에서도 군대만큼은 국가의 안전이 걸려있기 때문에 권위를 강조합니다. 병사는 그 군대 조직 안에 있는 구성원으로 위에 세워진 권위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의무를 갖습니다.

디모데가 병사라면 그 조직의 위에 권위를 갖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입니다. 예수가 명령하시면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주어진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병사인 디모데의 역할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를 목자와 양,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만 이해하며 오늘날 익숙한 탈권위와 소통의 문화를 관계 안으로 들여놓습니다. 목자는 양이 까탈스러워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탕자라도 안고 입 맞춰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를 다른 말로도 표현하는데, 이는 주인과 노예, 혹은 디모데후서 2장 1-4절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군대의 대장과 부하의 관계입니다. 이 모델은 어떤 모양의 권위에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현대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불편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강력한 권위 아래 굴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충성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는 병사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절대 권위를 갖고 그 명령에 절대 굴복할 것을 요구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많은 권위가 잘못 사용되는 것을 보았고 그 권위를 가진 자를 그래서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권위를 남용하지 않으셨고 자기가 창조하신, 자기를 위해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절대 권위를 갖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발아래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완고한 자는 언젠가 심판대 앞에서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그 절대 권위를 가지신 분이 자기 권위를 내려놓고 피조물과 같이 되셔서 피조물을 위하여 피조물에게 죽임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로서 그 압도적인 사랑과 하늘 보좌에 좌정하여 다스리시는 그분의 권위 앞에 자발적으로 기뻐하며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는 이와 같은 사랑의 절대 권력 구조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두 번째로 이 명령을 하고 있는데 “~과 함께 고난을 받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가 여기 사용되었습니다. 개역개정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많은 사본이 “나”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편지 초반에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하지 말고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고난을받으라(딤후 1:8)

바울 자신도 주의 복음을 증언하다가 옥에 갇히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사에게 고난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군인은 빛나게 잘 닦인 구두를 신고 빳빳하게 다려진 군복을 입으며 폼나게 다니기 위해 군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은 구두가 진흙에 파묻히고 옷이 밀림과 수풀 속에서 뒹굴면서 구겨지고 더럽혀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입니다. 군인은 전투를 준비하거나 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삽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우며 느긋한 전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긴장과 두려움, 상처와 고통, 상실과 실패가 늘 따라오는 것이 전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습니다. 상처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통은 이미 예견된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다른 세상의 법 아래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귀의 통제 아래 사는 사람과 함께 사는 삶은 실패와 좌절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신자가 날마다 씨름해야 하는 영적 전쟁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병사이기 때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 명령에 불복종하겠습니까?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런 군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관의 명령에 “지금은 그 명령에 순종할 기분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온종일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저는 이미 많이 지쳤고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싸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와 배려입니다.” “아무리 당신이 상관이지만 어떻게 저에게 이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 있습니까? 제가 그런 마음이 들면 나중에 하겠습니다.”

이런 병사는 명령한 상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권위를 무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군대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입니다. 병사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좋은 병사로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따르면 선한 군인답게 함께 고난을 받아라”입니다(‘좋은’의 원어적 의미는 ‘나무랄 데 없는’, ‘떳떳한’, ‘훌륭한’입니다).

누가 좋은 병사입니까? 당당하게 상관의 명령에 따라 고난을 받는 병사입니다. 어떤 사람을 선한 군인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선한 군인입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병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떳떳한 병사로서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선임병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런 본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대로 복음을 위해 고난을 택하고 충성스럽게 싸우고 있는 믿음의 선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택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

이 말씀은 마치 군대 훈련병 양성을 위한 지침 같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을, 또 그 충성된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일에 함께 참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게으르고 악한 병사가 되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병사는 다른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군인은 마땅히 선하고 충성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병사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주의 병사가 담대하게 나가서 싸우지 않고 골리앗의 으름장 앞에 무서워 덜덜 떨면서 감히 전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병사처럼 세상과 죄와 마귀와 맞서 싸우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 일상에 숨어 조용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당당하게 맞서 싸우라는 명령에 부담을 느끼고 자기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을 불통이라 말하며 답답해합니다. 수많은 기독교 관련 기사와 서적들에서 우리는 “청년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청년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것이 문제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물론 소통이 필요합니다. 위로와 격려, 사랑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군대입니다. 고통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겪는 진로와 학업, 직장과 사회의 문제는 물론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복음을 위한 고통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당당하게 앞에 나가서 골리앗 같은 마귀와 블레셋 병사 같은 세상과 맞서 싸울 주의 선한 병사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병사는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의 힘으로 싸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하나님의능력을따라하나님의은혜가운데서강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처럼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나약해지지 맙시다. 세상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상대하느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의무는 과분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환자처럼, 혼자 상처 입은 사람처럼 억울해하지 맙시다. 아무런 구김살 없이 어려움 없이 고통 없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대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 복음을 들고 마귀가 거느리는 세상과 맞서 싸우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병사입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여, 내 전우여, 함께 고난을 받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