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Grace to Korea 웹사이트에서 저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주일예배 후 그룹모임에서 성경에 대하여 나누기보다는 세상 모임과 똑같은 주제로 흘러가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성경 이야기를 자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평범한 신자입니다. 오히려 그들과 같이 웃고 즐길 때는 좋았던 관계가 성경 이야기를 시작하고부터 안 좋아지고 제가 마치 문제 있는 사람인 것처럼 흘러가는 이 분위기가 너무 안타깝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만 알면 된다, 그 외의 교리들은 그리 중요치 않으니 논쟁하지 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답변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받고 몇 가지 꼬리를 무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생각에 잠겼습니다.

1. 세상 모임과 같은 주제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문제인가요?

그리스도인은 정치 이야기를 나누면 안 될까요? 직장에서 겪는 일에 대해 나눌 수 없을까요? 저리로 돈을 빌릴 방법이나 부부 사이에 생긴 크고 작은 문제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없을까요? 세상에 일어난 잡다한 소식이나 정보를 공유할 수 없을까요? 성도들은 모여서 무조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삼위일체 교리 등에 대해서만 나눠야 할까요?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성도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 그 자체의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세상 모임과 같은 주제로 흘러가는 모습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흘러간다”는 표현은 어떤 이야기로 시작하든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세상 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의 흐름과 같은 방식으로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세상 모임에서 나누는 주제를 가지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대화의 내용입니다. 삶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깃거리기 때문에 가정이나 직장, 사회 관련 소재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항상 대화가 거기에서 맴돌고 세상 사람들이 대화를 마치는 것처럼 막연한희망(“뭐~ 어떻게든 잘 먹고 잘살 수 있겠지”, “대박 터지는 날이 오겠지”), 불평(“세상이 이렇게 썩어서 그래”, “나 같은 사람이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회사가 아니야”), 분노(“그 상사 정말 화나게 해”)와 낙심(“뭐, 어쩌겠어. 다 이렇게 고생하는 거지”) 등으로 대화를 마치는 것은 이 땅의 백성이기 전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나눌 대화의 모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런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각자 처한 환경에 대한 감정을 나눌 수 있고 서로를 세워 줄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가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성경 이야기가 어색하고 안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화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1) 만일 어떤 성도가 가정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주제를 꺼내면 대화의 흐름이 어색해지고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또 성경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자세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나누는 삶의 문제에 공감하기 보다 먼저 성경의 지식으로 바로 잡고 가르치려고 한다면 듣는 사람의 기분이 상할 수 있습니다. 

3) 어떤 경우는 해박한 성경 지식을 요구하는 주제를 대화 중에 꺼내서 상대방이 말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이제 막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성도에게 원죄 교리나 예정설에 대해 나누자고 하면 전혀 덕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성도의 교제 가운데 나누는 성경 이야기가 어색하지 않고 좋을 수 있을까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대화의 흐름 가운데 자연스럽게 사용할 때, 가르치려는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을 공감하며 상대방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세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할 때, 그리고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나눌 때 가능합니다.

 

5. 그렇게 했는데도 성경 이야기를 하면 싫어하는 분위기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 있는데 이는 세속주의입니다. 세속주의는 내가 믿고 있는 것과 현실을 억지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가령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교리는 잘 알고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가 현재 사는 현실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 그것도 교회 안에서만 예식 가운데 참여할 때 사용되는 것이고, 실제로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영역에서 성경 이야기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생각입니다.

그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계시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다 주관하고 계시지!” “하나님은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지” “우리의 보물은 하늘나라에 있지” “이 땅의 고난은 잠시뿐이고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선하신 뜻대로 허락하신 일이며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정작 직장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것은 실제 삶과 관계없는 혹은 관계가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속주의의 결과입니다. 믿고 있는 것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어보면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실제 그들의 삶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염려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들의 걱정이나 불평, 낙심에 전혀 위로와 격려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도의 교제 가운데 진정한 위로와 격려의 도구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사용되고 그것이 겸손과 온유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는데도 거부반응을 보인다면 어쩌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더는 성경의 능력을 믿지 않고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위로받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6.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세상 주제로 흘러가기만을 바라지도 않고 진리의 말씀이 아무 효과 없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교제의 중심에 머물기를 기대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서로 담당하고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가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성경의 교훈이 성도가 서로 감당하고 받는 교제를 나눌 때 참된 위로와 소망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빌립보 성도들에게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과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하였습니다(빌 4:8). 그것은 바로 9절에 바로 나타난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바”입니다. 바울이 전해준 진리의 말씀이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편지하면서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명령합니다(살전 5:14). 교제의 대상에 따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매뉴얼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울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살전 5:20). 권위 있는 말씀이 그들이 행할 여러 가지 명령들(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등)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 함께하라고 명령합니다(히 10:25). 그러면서 “서로 돌아봐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말합니다(히 10:24). 그들의 사랑과 선행의 동기는 23절에 나오는 “소망”“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며 그것이 성도가 나누는 교제 가운데 사랑과 선행을 불러일으키는 참된 소망이 됩니다.

베드로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으로 고난 중의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편지로 교제하면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명령합니다(벧후 3:18).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성경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성경으로 흘러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19).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풍성하고 아름다우며 세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진정한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참되기 때문이고 그 소망이 곧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에서 그분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치 생수의 근원을 되찾은 사람이 터진 웅덩이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생수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말하면서 생수를 마셔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여 찾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불안한 마음과 염려로 가득 찬 생각을 모두 지키십니다(빌 4:7).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예수를 본받을 수 있게 하시며 성도의 뜻을 하나로 만들어 주십니다(롬 15:5). 그분은 모든 위로와 자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고후 1:3). 그분의 위로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십니다(고후 1:4).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뿌리십니다(시 97:11). 그의 앞에는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시 16:11).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롬 8:26).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를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하십니다(벧전 1:8-9). 그분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반드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롬 8:28).

바울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7. 어떻게 성경 이야기로 교제 중에 참된 위로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실제 상황 가운데 어떻게 성경의 이야기로 교제할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세상 주제만으로 교제하기>

성도1: 직장생활 정말 하기 힘드네

성도2: 요즘 다 그렇지, 왜 무슨 일 있어?

성도1: 계속 잔업 시키고 돈은 제대로 지급 안 하고 언제 나갈지도 모르고…

성도2: 정부가 바뀌었으니 좀 나아지지 않겠어?

성도1: 바뀌어도 내가 다니는 직장이 바뀔 때까지 내가 남아 있을까?

성도2: 우리 회사도 그래, 다 힘들게 사는 거야

성도1: 그래, 처자식 먹여 살리기 힘들다

성도2: 요즘은 명예퇴직도 일찍 한다고 하더라. 은퇴하면 그땐 어떻게 살지 막막해

성도1: 그러게 사회가 뭔가 잘못되어 있어. 일은 오래 하고 대우는 별로고

성도2: 어쩌겠어,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부자들은 부자로, 고생하는 사람은 계속 고생하고

성도1: 빨리 하늘나라 가야지 이런 세상에서 벗어나지

성도2: 그래, 맞아. 다음 주까지 잘 버티자!
*이런 교제는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패턴의 교제 그 이상의 교제를 우리가 충분히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만 할 수 있는 더 풍성한 교제>

성도1: 직장생활 정말 하기 힘드네

성도2: 왜 무슨 일 있어?

성도1: 계속 잔업 시키고 돈은 제대로 지급 안 하고 언제 나갈지 모르고…

성도2: 그래, 정말 요즘 일하기 더 힘들어진 것 같아. 우리 회사도 요즘 잔업이 많이 늘었어

성도1: 명예퇴직도 일찍 한다고 하던데 은퇴하면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

성도2: 그래 나도 종종 그런 걱정이 생기더라고. 일도 힘든데 이런 생각마저 하면 더 걱정이 많이 되지

성도1: 사회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어

성도2: 맞아. 그래서 이 세상에서 소망을 찾는 것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 같아

성도1: 그래 맞아. 천국에 가면 이런 고생 안 하겠지?

성도2: 그럼, 안 하겠지. 그런데 이 땅에서 일할 때도 하나님은 그냥 천국에 갈 때까지 버티면서 살라고 우리를 직장생활로 부르신 건 아닌 것 같아. 우리를 직장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성도1: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는 거지

성도2: 응, 그것도 당연히 있지.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지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소명이라고 생각해

성도1: 그거 말고는 없지 않나?

성도2: 글쎄, 우리가 세상과 접촉하는 영역은 거의 직장이잖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거기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일하니까. 그들도 우리처럼 잔업하고 돈을 제대로 못 받고 하는데 화가 많이 나고 불평도 많이 할 거야. 하지만 우리는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니까 그 가운데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고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게. 베드로전서 말씀 시간에 그렇게 살 때 우리가 세상에게 주의 빛을 전할 수 있다고 배운 것 같아

성도1: 그래,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성도2: 그래, 천국에 갈 때까지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고, 죄로 인해 망가진 사회 조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 땅에 하나님이 두신 선한 뜻대로 살아가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주 안에서 그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참 소망과 기쁨을 가질 수 있어!

성도1: 그래, 열심히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으면 좋겠다.

성도2: 그래, 맞아. 다음주까지 주께 하듯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할게

 

결론: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항상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상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렇게 교제 나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교제 속에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을 소망으로 두고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죽어서나 가는 곳, 하나님은 그 나라에 가서나 나와 만나고 뭔가 교제를 시작할 수 있는 분으로 여기는 세속주의를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무궁한 영광을 얼굴과 얼굴로 대하지 못했지만 이미 그분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대화 속에서 성경은 자연스럽게, 어렵지 않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격려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는 태도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고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위로받고 격려받는 것은 이 땅의 것들이 아니라 참된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 위로, 격려, 소망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리로 교제하는 것은 정답만 강요하는 교제도 아니고, 신령하고 영적인 체하는 가식적인 교제도 아닙니다(물론 그렇게 변질되는 경우도 있으며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와 처지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한다면 진리는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소망과 평안과 기쁨을 제공할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가 빠진 교제는 어느 정도의 공감과 유대감을 가져올지 몰라도 천국에 가는 그 날까지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사실만 반복해서 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신령한 젖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갓난아기처럼 진리를 사모하고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일로 서로에게 진정한 기쁨과 격려와 위로를 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제만큼 그리스도인을 세워주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점점 개인적인 신앙을 고수하고 서로 교제하는 일을 멀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우리가 교제의 힘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는 우리가 교제 가운데 서로에게 참된 소망을 전달하는 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집시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그분 안에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가 어떻게 시작했든지 항상 서로 이렇게 권하는 교제로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