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권 구원이 주목받은 이유는 1988년 존 맥아더 목사가 “참된 무릎꿇음”이라는 책을 낼 무렵 알미니안 신학의 영향 아래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선택이 강조된 구원론이 강세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리 그래함을 비롯하여 많은 설교자가 “인간이 믿기로 결단해야만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라는식의 전도를 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결단의 단계를 둘로 나누는데 첫째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단계, 둘째로는 그 예수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단계다. 그들은 각각의 단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였지만, 문제는 그 은혜를 1차와 2차로 구분하여(영어로는 Blessing이라고 하기도 함)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말하고 있는 믿음과 주되심을 둘로 나누었다는 데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1차 하나님의 은혜 아래 인간이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로 결단한 시점에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위해서는 두 번째 결단이 필요하다. 2차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는 결단을 하는데 “주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겠다”는 결단을 이 시점에서 한다. 주되심을 인정하는 단계다. 어떤 사람은 1차 결심은 믿는 것으로, 2차 결심은 제자가 되는 것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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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아더는 ‘믿음은 주되심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 얻는 믿음은 주되심의 관계 안에서 맺는 행함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믿음과 주되심을 위의 도표와 같이 분리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빠진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 맥아더는 위의 도표에서 Q1에 위치한 사람의 상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만일 믿음과 주되심을 억지로 분리한다면 Q1에 위치한 사람의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 진지하게 묻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를 믿었다’고 고백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면 그 사람에게서 아무런 열매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구원은 받았다고 선포해야 하는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지만, 주인으로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신자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봐야 하는가?

예수님은 이 질문에 아주 명료하게 답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사도 요한의 대답도 단호하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4-6)

요한의 구분은 명확하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면(‘아노라’) 그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증거가 없으면 그가 ‘그를 안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다. 하나님과 그의 관계는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다.

성경은 “행함”이 따라오지 않는 “믿음”이 가짜라고 말한다.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마 7:19). 그래서 존 맥아더의 주재권 구원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의 열매를 보이지 않는 영혼에 대해 그 “믿음”이 가짜라고 분별한다. 그는 단지 입술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마 7:21)이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귀신처럼 하나님 앞에서 믿고 떠는 자는 될지라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약 2:19). 참된 믿음은 주되심에 근거한 행함을 반드시 요구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해둘 것이 있는데 “행함”은 “완벽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완벽에 이를 수 없다. 신자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이다. 이 땅에서 요구되는 것은 지속적인 성장이다(벧후 3:18). 거듭남과 동시에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는 것은 성경이 묘사하는 성장의 모습과 다르다(붉은 화살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난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순종을 통하여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는 주의 백성이 된다(딛 2:14). 그러나 육신의 출생 이후 성장이 그러하듯 영적 성장 역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갓 구원 얻은 신자에게 장성한 분량의 성품과 성숙함을 기대할 수 없다. 바로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이 터져 나올 수 있어도 그것이 갓 구원 받은 신자가 옛 자아가 지배한 오래된 성품과 죄악 된 습관을 단번에 모두 바꾸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는 아주 미세하게나마 살아있는 증거를 보인다.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며 말씀을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죄만 사랑하는 지체 안에 선을 사랑하는 성령이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살아계심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되어있다. 끊임없이 말씀으로 오래된 생각을 제거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이다(엡 4:17-24). 그래서 베드로는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 말씀을 사모하라고 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서다(벧전 2:2).

그렇다면 왜 이런 방식의 구원론이 생겼을까? 

첫째, 알미니안의 영향 아래 인간의 선택이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한번 사람이 “믿는다”라고 결단하면 그것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 결단의 진정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주여”라고 말해도 주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고백이 가짜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주여”라고 말하는 것의 진정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성의 증거로는 뜨거운 감정, 마음의 평안, 위로 등 대부분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면이 주목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되심을 인정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주어지지 않는다. 1차 은혜가 내려지고 나서 인간이 다음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성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선택을 강조한 나머지 구원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치게 간과한 것이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는 누구신가? 무게중심이 인간의 선택에 지나치게 기울어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원론이 생긴다.

둘째, 행함을 완벽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가진 사람 중 누구도 최초의 믿음에 “나는 예수를 주로는 인정하지 않아.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돼”라는 고백이 들어가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다만 믿음의 고백 이후의 삶이 요구하는 것이 초신자에게 있어서는 너무 높다는 것이다. 성장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우려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반대로 돌아서 행함이 전혀 없는 것까지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초신자의 연약한 상태에 대한 배려는 필요하지만, 그 배려가 그들의 삶에 뚜렷이 드러난 열매 없는 상태까지 감싸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진영을 FG(“Free Grace”)라고 하며 주재권 구원(LS: :Lordship Salvation)을 반대한다. 그들은 “값없는 은혜파”라고 스스로를 부르기 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중요하고 높은 자리에 두기 원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주장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연약하게 만드는 데, 주권적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은혜로 주시고 그 믿음의 결과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인간의 선택”으로 제약했기 때문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가 아닌가?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이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원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주재권을 근거로 한 행함을 포함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성경이 구분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이분화한다면 앞에 있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에서 멀어진다. 믿음은 주되심에 근거한 행함이 빠진 단순 고백이 되며 그것의 진실성에 의문이 생긴다. “주여 주여 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으로 인정된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으로 보는 문제다. 믿음을 구원의 수단이 아닌 원인으로 두기 때문에 일단 “믿었다”고 결단하면 그 결과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장두만 박사는 위와 같은 FG의 입장을 비판하고 주재권 구원이 주장하는 다음의 사실에 동의한다.

1. 구원 얻는 믿음이란 복음 진리에 대해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이다. 복음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지식 이상인 것이다.

2. 죄로부터 회개는 복음을 제시할 때 반드시 포함돼야 하며, 따라서 믿음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는 그 순간 예수님이 실제로 삶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4. 진정한 구원은 분명히 열매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찾아보는 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그 열매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요,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다.

5.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가 나중에 분명히 부인하고 돌아선다면, 그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으로 볼 수 없다.

6.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나 구원받은 것이다’는 확신은 진정한 고백을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이런 확신이 적용될 수 없는 거짓 고백도 분명히 있다.

결론

질문은 “참된 믿음에 맞게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이다. 주재권 구원을 불편해하는 사람은 참된 믿음이 요구하는 순종이 불편하다. 우리가 모두 믿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종을 완벽함과 혼동하여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에서 순종을 제거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믿음의 고백과 결단으로 일단 구원을 확보한다. 순종은 구원의 궤도에 오른 사람이 두 번째 은혜를 경험할 때, 즉 예수를 주인으로 삼고 제자가 되기로 결단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이 아니다. 영적 탄생은 영적 성장과 이분화할 수 없다. 더디지만 태어나면 자라는 것이 정상이다. 신자이면서 제자가 아닐 수 없고 제자이면서 신자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신자가 주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라 말씀하셨고(마 10:33), “내 양은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셨다(요 10:27).

문제는 성경이 구분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것의 문제다. 참된 믿음에서 주되심의 관계에 근거한 순종을 분리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낸다. 그들은 단지 주되심을 인정하는 결단을 못 내린 것뿐이기 때문이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영혼에게 “너는 천국으로 간다”고 거짓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함을 부지런히 추구해야 할 신자가 나태하고 방종된 삶을 살아도 일단 천국 보험을 들었다고 안심시키는 것이니 성경 그 어디에서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지지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메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죽은 영혼에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인간의 선택에 힘없이 매여있는 것이니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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